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앨런 튜링 (문단 편집) === 청년 시절 === 영국의 명문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첫 입학 시험에서 바로 합격했다. 하지만 장학금을 타지 못했기에 재시험을 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킹스|킹스 컬리지]] 재학 중에 이미 (1936)이란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튜링 머신]] 이론과 노이만형 컴퓨터에 있어서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튜링 머신]]은 컴퓨터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명제의 증명 가능성에 대한 연구에서 처음 이용된 개념이다. 튜링은 [[러셀의 역설]]이나 [[불완전성 정리]]처럼 '나는 유한 번의 논리처리로는 증명 안 됨'이라는 명제를 증명하였는데, 중간에 튜링은 칸이 나눠진 긴 종이 띠와 이 위의 데이터를 읽고 바꿔쓰는 기계가 읽은 데이터에 대해서 바꿔쓰는 결과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이것이 수학적 증명과 인간의 지능과 동일하다는 걸 증명한다.[* 전후에 튜링은 이 '만능 기계'를 완전히 실현하려다 실패하였고, 이에 약간 변형된 형태가 [[폰 노이만]]에 의해 실현되어 지금의 [[컴퓨터]]가 된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tumblr_1c71f6ace23694b40063b96cd99091ff_b690380a_400.jpg|width=100%]]}}}|| || 프린스턴 대학교 재학 당시 (오른쪽) || 튜링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과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 때 프린스턴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존 폰 노이만]]과 친분을 쌓게 된다.[*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역으로 참가하고 수학과 컴퓨터공학, [[양자역학]]과 통계학 등 온갖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세운 그 노이만이 맞다. 만약 튜링이 이미 사회적 입지를 다진 노이만의 후원을 등에 업고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면 허무한 죽음을 피하는 것은 물론 장수하며 더 많은 놀라운 성취들을 이뤄냈을 것이다.] 튜링과 9살 차이인 노이만은 그와 교류하며 재능을 눈여겨 보았고, 튜링의 [[동성애자|성적 지향]] 또한 알게됐지만 변함없이 친분을 유지했다. 이후 튜링의 박사 과정이 끝나가자 노이만은 동성애가 범죄로 분류되는 영국으로 귀국하기보다는 미국에 남기를 충고했다. 노이만은 튜링에게 자신의 조교직을 제안하였으나 당시 애국심에 불타던 젊은 튜링은 조국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조교직을 거절하고 영국으로의 귀국을 선택한다.[[https://www.gresham.ac.uk/watch-now/turing-and-von-neumann|#]]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